네팔 정부가 4년 동안 준비해온 국제 티베트 연구 학술회의를 개최 직전 전격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네팔 정부의 자체 안보기관이 행사 취소를 권고하지 않았음에도 고위 정부 관계자가 개최 중단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외교적 압박이 행사 취소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카트만두포스트에 따르면 고빈다 바하두르 카르키 네팔 정부 수석장관은 암리트 바하두르 라이 외교장관과 협의한 뒤 카트만두대학교 고위 관계자들에게 직접 연락해 행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해당 결정은 내각에 공식적으로 상정되지 않았으며,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이번 사안이 상당한 외교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네팔 내 한 안보기관은 학술회의를 여러 측면에서 검토한 결과 개최를 취소할 정도의 위험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 개최 약 18~19일 전까지도 해당 기관은 상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방안을 택했으며, 취소를 명시적으로 권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행사 취소 결정 직전까지 네팔 정부의 공식 입장은 달랐다. 수단 구룽 네팔 내무장관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술회의를 취소하지 않을 것이며 참가자들에 대한 보안 검증을 실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상황이 급변한 배경에는 중국 측의 외교적 로비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국의 장마오밍 주네팔 대사는 지난 7월 21일 라이 외교장관을 만나 학술회의 참가자들의 발언과 활동에 대해 경계를 강화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측이 행사 자체의 취소를 직접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친티베트 성향의 발언이 나올 가능성을 우려하며 네팔 정부에 주의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중국불교협회 전 부회장이자 네팔 중국사찰 주지인 인순 대사가 7월 29일 카트만두를 방문하면서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인순 대사는 네팔 방문 기간 카트만두와 룸비니 등을 찾았으며, 한 고위 안보 관계자는 그가 학술회의 문제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이후 인도에 위치한 티베트 정책연구소 소속 전문가 6명이 학술회의 참가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팔 정부 관계자들은 중국이 현 정부를 친서방적으로 바라보는 상황에서 이번 학술회의가 네팔의 외교적 중립성을 시험하는 사안으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우려를 달래기 위해 네팔 정부가 결국 행사를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도 정부 내부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학술회의 주최 측은 해당 행사가 정치적 행사가 아니라 순수한 학술회의였다고 반박했다. 네팔은 지난 2022년 국제 티베트 연구 학술회의 개최지로 선정됐으며, 행사를 위해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이 참가를 준비해왔다는 설명이다.
이번 회의에는 티베트의 역사와 언어, 문화, 예술, 철학, 종교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약 100명의 중국 학자와 전문가들도 등록했으며, 중국 티베트학 연구센터와 중국 내 주요 대학 관계자들의 참석도 예정돼 있었다.
주최 측은 중국 측의 핵심 요구도 이미 수용했다고 밝혔다. 친티베트 또는 반중국 활동이나 발언을 허용하지 않고 관련 활동가들을 초청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네팔 당국에 약속했음에도 정부가 행사를 취소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카트만두대학교 역시 해당 행사가 정치적 목적이 없는 순수 학술행사였다고 거듭 강조했다. 대학 측은 행사 취소를 요구하는 상당한 압박을 받아왔다고 밝혔으며, 결국 공동 주최 기관에서 물러나면서 행사의 향후 개최 여부는 국제티베트연구학회가 결정하게 됐다.
이번 사태는 중국의 새로운 민족단결법 시행 이후 티베트계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지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해당 법은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됐으며, 중국 당국이 내세우는 민족단결을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목표와 연결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주최 측은 티베트계 주민들의 중국 민족단결법 반대 시위가 이어지면서 중국 정부의 경계심이 높아졌고, 이 때문에 네팔 내 학술회의에 대한 외교적 압박도 강화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학술회의가 취소됐음에도 중국 측 대표단의 네팔 방문은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상무위원이자 민족종교위원회 부주임인 장젠궈는 5명의 대표단과 함께 오는 8월 18일부터 사흘간 네팔을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은 네팔이 중국과 인도, 서방 국가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티베트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외교 현안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자국 안보기관의 판단까지 뒤집으면서 학술행사를 취소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네팔의 국내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까지 작용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커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