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버스기사의 딸에서 노벨평화상까지…'전쟁범죄의 판사' 나비 필레이

49분 전2노르웨이, 오슬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9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법률가 나비 필레이(85) 전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평화와 국제법 증진을 위한 노력"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넬슨 만델라 등 정치범을 변호했던 필레이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강간이 제노사이드가 될 수 있다는 판례를 세웠고, 이후 국제형사재판소 판사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유엔과 남아공은 환영했지만, 이스라엘은 "반이스라엘 증오의 정당화"라고 반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위원회가 상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비난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법률가 나바네템 '나비' 필레이(85) 전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선정했다. 요르겐 바트네 프뤼드네스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9일(현지시간) 오슬로 노르웨이 노벨연구소에서 필레이의 "평화와 국제법 증진을 위한 노력"을 기려 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노벨위원회는 필레이가 전쟁범죄, 반인도범죄,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처벌받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시절 넬슨 만델라를 변호한 일과 훗날 굵직한 국제 재판에서 판사로 일한 경력이 "하나의 공통된 실"로 이어져 있다고도 설명했다. 위원회는 "국제법은 더 이상 평화와 안보의 보조물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밝혔다. 프뤼드네스 위원장은 국제 법질서가 압박을 받고 그 제도들이 공격받고 있다며, 판사들이 "질서와 혼돈 사이의 가느다란 붉은 선"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다.

"국제범죄 생존자들에게 바친다"

필레이는 수상 소식에 "이 상을 국제범죄의 모든 생존자에게 바치겠다"고 말했다. 노벨연구소 측의 연락을 받고는 "당신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필레이는 나치 지도부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법정에서 소감을 밝혔다. 그는 국제법과 인권이 특히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공격을 통해 "심각한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사탕수수 농장 계약노동자의 손녀

필레이는 1941년 9월 23일 당시 남아프리카연방 나탈주의 항구도시 더반에서 가난한 타밀계 인도인 가정의 여덟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조부모는 1890년대 나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려고 인도에서 건너온 계약노동자였다. 아버지 나라인사미 나이두는 버스 운전기사였고, 생계를 보태려고 고기잡이 등 다른 일도 했다.

또래 여자아이 상당수가 일찍 결혼하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는 딸들도 아들처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고집했다. 학교 자리가 아이들 수보다 부족하자 어머니는 입학 줄에 서서 손위 자녀의 출생증명서를 내고 동생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학용품 살 돈이 모자라 형제들이 쓰던 공책의 빈 장을 모아 꿰매 쓰기도 했다.

법과의 첫 만남은 다섯 살 때였다. 아버지에게 전해 줄 한 달 치 임금 5파운드를 도둑맞았고, 어린 필레이가 법정에서 증언했다. 범인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열 살 때는 남아공 법정에서 흑인이 백인보다 무거운 형을 받는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라디오도 신문도 접할 수 없어 부모와 교사에게서 귀동냥한 이야기로 쓴 글이었다.

지역 인도계 공동체의 후원으로 나탈대학교에 진학해 1963년 학사, 196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캠퍼스는 강의와 졸업식까지 인종별로 분리돼 있었다. 필레이는 비백인 도서관에서 필수 교재 한 권을 동급생 20명과 나눠 봐야 했다. 1959년 대학 재분리를 강제한 '분리대학법'으로 비백인 대학으로 옮겨야 했지만, 그곳에는 법학사 과정이 없었다. 필레이는 법무장관실에 예외를 신청했고, 답이 없자 직접 전화를 걸어 결국 나탈대로 돌아와 학위를 마쳤다.

"판사실에 처음 들어간 날은 내 방에 들어간 날"

졸업 후 필레이를 고용하겠다는 법률사무소는 없었다. 그는 훗날 "백인 직원이 유색인의 지시를 받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어떤 로펌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1967년 그는 나탈주에서 비백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비백인 변호사라는 이유로 판사실 출입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28년의 변호사 생활 동안 필레이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흑인의식운동 등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들을 변호하며 정치범 고문과 열악한 수감 환경을 고발했다. 1971년 남편이 테러방지법으로 구금되자 경찰이 불법 신문 방식을 쓰지 못하게 하는 소송을 내 이겼다. 1973년에는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로벤섬 정치범들이 변호사를 접견할 권리를 법정에서 따냈다.

1981년 하버드-남아공 장학 프로그램으로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해 1982년 법학석사, 1988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첫 남아공인이다.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운영했고, 남아공 헌법에 인종·종교·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 조항이 들어가는 데 힘을 보탰다. 1992년에는 국제 여성인권단체 '이퀄리티 나우'를 공동 설립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고 ANC가 집권한 이듬해인 1995년, 만델라 대통령 시절 필레이는 비백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남아공 고등법원 판사가 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판사실에 들어간 날은 내 판사실에 들어간 날이었다."

르완다 법정에서 "강간은 더 이상 전리품이 아니다"

고등법원 재임은 짧았다. 같은 해 유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판사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필레이는 8년간 재판소에 몸담았고,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재판소장을 지냈다. 출범 후 첫 4년 동안은 유일한 여성 판사였다.

가장 큰 족적은 1998년 9월 2일 선고된 '장폴 아카예수 사건'이다. 르완다 타바 지역의 시장이던 아카예수는 투치족 여성들이 피신한 곳에서 민병대의 강간을 묵인하고 부추긴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강간과 성폭력이 제노사이드와 반인도범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제 형사 재판에서 처음 세워진 판례였다. 필레이는 당시 "태곳적부터 강간은 전리품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전쟁범죄로 다뤄질 것이다. 강간이 더 이상 전쟁의 트로피가 아니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필레이는 대량학살을 선동한 언론의 책임을 다룬 이른바 '미디어 재판'에도 참여했다. 이 재판은 투치족 혐오를 퍼뜨린 '밀 콜린 자유 라디오·텔레비전(RTLM)'과 잡지 '캉구라' 관계자들을 집단학살 직접·공개 선동 혐의로 단죄했다. 언론의 증오 선동이 실제 학살로 이어지는 구조를 법적으로 다룬 사례로 평가된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2003년 필레이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출범과 함께 초대 판사로 선출돼 상소심 재판부에서 일했다. 재임 중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 지역에서 15세 미만 아동을 징집한 토마스 루방가 딜로 사건의 재판 전 단계에 관여했다.

2008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필레이를 루이즈 아버에 이은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지명했고, 유엔총회가 만장일치로 인준했다. 미국은 낙태 등에 대한 필레이의 견해를 이유로 처음에는 임명에 반대했다가 반대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2년 연임해 2014년 8월까지 재임했다. 이 시기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인권최고대표 부대표로 그와 함께 일했다.

필레이는 인권최고대표를 "모든 곳에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라고 정의했다. 그는 카스트 차별 철폐를 요구했고, 2011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성소수자 권리 결의를 지지했다. 2013년에는 스리랑카 내전 말기 타밀 민간인 피해와 관련해 스리랑카 정부를 비판했다. 스리랑카 정부와 지지자들은 필레이의 타밀계 혈통을 문제 삼았지만, 필레이는 편향 주장을 강하게 부인했다. 2014년 가자 전쟁 때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국제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고, 미국 의원 100여 명이 유엔 인권이사회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 해 시리아 내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마비"를 질타했다.

로힝야 재판과 가자 조사위원회

퇴임 후에도 필레이는 국제 사법의 최전선에 남았다. 2019년부터 감비아가 미얀마를 로힝야족 제노사이드 혐의로 제소한 국제사법재판소(ICJ) 사건에서 감비아가 지명한 임시재판관으로 일하고 있다.

2021년부터 2025년 11월까지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팔레스타인 점령지 독립 국제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조사위원회는 2024년 6월 2023년 10월 7일 공격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고, 2025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 가자 전쟁에서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이스라엘과 일부 단체는 필레이와 위원회를 편향됐다고 비판해 왔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위원회에 종료 시한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필레이는 이에 "점령에도 종료 시한이 없다"고 맞섰다.

엇갈린 반응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필레이가 "법의 힘이 힘의 법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를 "국제법과 인권의 챔피언이자 흔들림 없는 독립적인 정의의 목소리"라고 불렀다.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필레이를 "큰누나"라고 부르며 "당연한 수상이라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권이 여러 전선에서 공격받는 지금이라 이번 수상이 특히 뜻깊다고도 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필레이의 용기와 청렴, 정의를 향한 평생의 헌신에 대한 헌사라고 밝혔다.

반발도 나왔다. 이스라엘 외교부는 이번 시상이 반이스라엘 증오와 편견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왜곡이라고 비난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의지를 공공연히 밝혀 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노벨위원회가 상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썼다. 같은 날 백악관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필레이는 2003년 그루버 여성인권상, 2025년 시드니 평화상, 올해 올로프 팔메상을 받았다. 지난해 유엔 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내 생애에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낸 국제적 연대가 더 나은 인권 보호 체계를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신 보도·공개 데이터를 AI가 한국어 기사로 재구성하고, 사람이 최종 검수한 뒤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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