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유럽 경쟁력 약화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도시의 규모'를 지목했다. 이 잡지는 15일(현지시간) 유럽 담당 칼럼 '샤를마뉴'에서 "유럽은 도시를 쾌적하게 만드는 기술은 완성했지만, 도시를 강력한 경제 엔진으로 만드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고 썼다.
EU 최대 도시 파리도 세계 기준으론 '중간 크기'
칼럼은 파리를 예로 들었다. 파리는 EU에서 가장 큰 도시지만 인구는 중국 상하이의 3분의 1, 경제 생산은 미국 뉴욕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인구 4억5천만 명의 EU를 대표하는 도시로는 초라하다는 것이다.
유엔(UN)이 인구 5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 세계 82개 도시권 가운데 EU 도시는 파리(약 1천만 명, 36위)와 마드리드(72위) 두 곳뿐이다. 경제 집중도 차이도 크다. 칼럼이 인용한 컨설팅업체 옥스퍼드이코노믹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0대 도시권이 전체 경제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지만 EU는 6분의 1 수준이다. 농촌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도 대도시의 생산 비중이 EU보다 높다.
반면 삶의 질은 최상위권이다. 이코노미스트 자매회사 EIU가 매긴 세계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서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오스트리아 빈이 맨 위에 올랐다.
"도시가 클수록 생산성도 높다"
경제학자들이 거대도시를 중시하는 이유는 '집적 효과' 때문이다. 사람이 한곳에 많이 모일수록 생산성 높은 인재와 혁신 기업이 서로를 찾기 쉬워지고, 아이디어와 기술이 빠르게 퍼진다. 칼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을 인용해 도시 인구가 두 배가 되면 생산성이 두 자릿수 비율로 높아진다고 전했다. 혼잡과 비싼 집값이라는 대가가 있지만, 세계적 수준의 경기장·공연장 같은 편의시설이 이를 상쇄한다는 설명이다.
국경에 갇힌 도시들
유럽에 중간 규모 도시가 많은 것은 역사적 배경이 크다. 오랫동안 중앙권력이 약하고 도시의 자치권이 강했던 탓에 촘촘한 도시망이 형성됐다. 각 도시는 자국 규모에 맞는 크기로 자랐고, 아무리 야심이 큰 도시도 국경을 넘어 커지기는 어려웠다.
칼럼은 수십 년간의 유럽 통합에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단일시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EU 전체 경제를 이끄는 몇몇 거대도시가 생겨났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션의 밀라노, 반도체 장비의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규제의 브뤼셀처럼 분야별 중심지는 있지만, 금융의 뉴욕이나 제조업의 중국 선전만 한 영향력을 가진 곳은 없다.
AI 시대엔 '분산'이 약점
칼럼은 이런 분산 구조가 인공지능(AI)처럼 승자가 대부분을 가져가는 산업에서 큰 약점이 된다고 봤다. 미국의 중소 도시 출신 졸업생이 기술 업계에서 일하려면 고민 없이 샌프란시스코로 가지만, 유럽의 같은 처지 졸업생은 베를린, 더블린, 파리 가운데 어디로 갈지 고민해야 한다. 인재가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어느 도시도 세계적 규모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안트베르펜·쾰른·브뤼셀처럼 고속철도로 가까운 도시들을 묶어 하나의 거대 도시권처럼 쓰자는 구상도 있다. 하지만 칼럼은 같은 장소에 모여 있는 이점이 짧은 거리만 떨어져도, 특히 국경을 넘으면 크게 줄어든다며 회의적으로 봤다.
다만 칼럼은 유럽 모델의 장점도 짚었다. 중간 크기 도시가 고르게 퍼져 있어 대도시 엘리트와 '뒤처진' 지역 유권자 사이의 단절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이다. 칼럼은 유럽에 세계 산업을 지배할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는 없지만, 도시 엘리트가 깔보는 미국식 '플라이오버 컨트리'(비행기로 지나치기만 하는 내륙 지역)도 없다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