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지난 5일 조기 총선을 선언하면서 유럽이 장기간의 '정책 공백기'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8일 유럽 칼럼 '샤를마뉴'에서 스페인의 11월 하순 총선을 시작으로 2027년 말까지 이어지는 연쇄 선거가 유럽을 "레임덕 대륙"으로 만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금부터 2027년 말까지 프랑스, 핀란드, 그리스, 폴란드, 이탈리아 등에서 선거가 잇따라 치러진다. 이 기간 EU 시민 절반 이상이 국가 지도자를 새로 뽑는다. 잡지는 대학이 방학 동안, 사무실이 연말연시 동안 멈추듯 유럽도 일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으며, 그 기간이 1년 가까이 이어질 것이라고 비유했다.
"선거 뒤로 미루자"는 손쉬운 선택지
칼럼의 핵심 우려는 EU 차원의 어려운 결정마다 "선거가 끝난 뒤에 하자"는 거부하기 힘든 대안이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잇따라 다른 정상들에게 투표 전에는 논쟁적인 타협을 할 수 없다고 호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로 든 의제는 단일시장 심화다.
잡지는 그 결과를 한 나라의 선거운동이 끝나면 다음 나라의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정치적 미루기(마냐나이즘)의 릴레이'라고 표현했다. 유럽이 경제 개혁, 방위 역량 강화, 회원국 확대에 대비한 EU 제도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보고서는 그동안 수없이 나왔지만, 그 권고들이 다시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난다고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잡지는 지적했다. 상당수 국가에서 EU에 우호적이지 않은 우파 포퓰리스트가 선거에서 이기거나 연정 구성의 열쇠를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생활비 부담 여전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이 해야 할 일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이 "거대한 협곡"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해묵은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새 문제가 계속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대표적이다. 잡지에 따르면 EU는 2022년 이후 가장 낮은 가스 비축량으로 겨울을 맞는다. 2022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에너지 위기가 시작된 해다. 이 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이란 전쟁으로 다시 악화됐다고 칼럼은 설명했다. 높은 연료 가격은 소비자들의 생활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너지는 '값싼 수입·값싼 차입' 모델
칼럼은 유럽의 오랜 경제 해법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유럽은 중국에서 값싼 물건을 수입하고,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지 않으면서 돈을 빌려 후한 복지국가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이 두 축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값싼 중국산 수입품이 이제 유럽 산업 기반을 위협하는 '약탈적' 존재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EU 정상들은 오는 15일 회의에서 대중국 무역 방어 조치를 도입할지 논의할 예정이다.
값싼 신용으로 재정적자를 메우던 시대도 끝났다고 잡지는 진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다. 칼럼에 따르면 50년 넘게 균형재정을 달성하지 못한 프랑스에 대해 채권자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면서 채권시장 압박이 커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가 내년 4월 대선 1차 투표 전에 재정 건전화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봤다. 최근 프랑스에서 학생 시위가 격화된 상황을 두고는 선거가 아니어도 통치가 쉽지 않은 상태라고 평가했다.
AI 경쟁 뒤처지고 예산 합의도 불투명
경쟁력 문제도 있다. 칼럼은 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 패권을 다투는 동안 유럽에는 최첨단 수준에 근접한 AI 모델이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유럽이 내부 문제에 매달리는 사이 하루하루 조금씩 더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EU의 차기 다년도 예산은 역내 경쟁력 강화를 핵심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여러 나라의 선거 일정이 겹치면서 예산 합의가 늦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시 밀리는 우크라이나, 커지는 러시아 위협
안보 환경은 더 엄중하다. 이코노미스트는 여름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해 전세를 뒤집는 듯 보였지만, 겨울을 앞두고 다시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EU는 2025년 말 900억 유로(약 1,01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승인했다. 원래 2년 동안 쓸 예정이었지만, 잡지는 추가 지원이 예상보다 빨리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칼럼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심이 우크라이나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정보기관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부 분열을 노린 하이브리드 공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을 더 이상 믿을 만한 안보 보증자로 보기 어려운 만큼 유럽이 공동 방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산체스 총리는 오히려 국방 증강 거부를 선거 쟁점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잡지는 스페인 유권자들이 앞으로 두 달 동안 주택 문제를 두고 논쟁하다가 불안정한 연정을 꾸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유럽이 내부 문제를 처리하는 동안 푸틴 대통령이 공격을 멈출 가능성은 낮다고 경고했다.
정책 공백보다 큰 위험은 선거 결과
칼럼은 선거운동 기간의 정체만이 위험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선거 승자들이 EU의 기존 청사진을 아예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스페인 총선이 유럽 전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겠지만, 유럽 주요국 정상 가운데 유일한 사회당 출신 지도자가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내년 4월 핀란드 선거는 어느 정당이 이기든 주목도가 높지 않을 것으로 봤다.
반면 폴란드와 특히 프랑스에서는 EU를 혐오하는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선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EU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선 여론조사 선두인 마린 르펜은 EU에 대한 재정 분담을 끊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줄이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대응은 하겠지만 주도는 못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선거가 없어도 유럽이 경직에 빠지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꼬집었다. 선거가 거의 없었던 지난 1년 동안에도 위기의식 부족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잡지는 연쇄 선거가 유럽을 완전히 멈춰 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EU 정상회의는 계속 열리고 규제도 만들어지며 공동성명도 나올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선거운동에 한쪽 눈을 둔 정치인들도 집중하게 마련이다.
다만 이코노미스트는 사건에 대응하는 것과 사건을 주도하는 것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잡지는 국방, 경쟁력, 통상,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큰 결정이 필요한 바로 그 시점에 유럽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몇 달 동안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